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타노 다케시 (문단 편집) === 학창 시절 === [[1947년]]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 다케시가 감독, 출연한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의 기쿠지로가 다케시 아버지의 실제 이름이라고 한다.]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는 [[야쿠자]]가 눈 앞에서 사망하는 모습도 목격할 정도로 심히 막장이었는데[* 지금은 개선되었지만 아다치 구는 한때 도쿄에서 치안이 가장 안 좋은 지역이었다.] 이 때의 경험이 오히려 영화를 만들 때 도움이 됐다고 한다.[* 덕분에 [[야쿠자]] 영화를 너무 사실적으로 찍어서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현역 야쿠자가 나름대로 옥의 티를 지적한답시고 다케시에게 전화를 걸어서 "바다에 시체를 버릴 때는 배를 가른 뒤에 버려야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를 본 야쿠자들이 우리 구역을 홍보해달라며 기타노 다케시에게 화환과 [[캐딜락]] 외제차를 선물한적도 있었다고. 공교롭게도 [[용과 같이 6]]에서는 진짜 야쿠자로 나온다.] 기타노 다케시는 어린 시절부터 [[수학]]에 조예가 깊은 우등생이었고 중 고교 시절 [[야구]]부원으로 활동했을 만큼 스포츠에도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성년자 시절부터 음주를 시작한 [[비행 청소년|불량 학생]]이기도 했다.[* 다케시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교 시절 친구들 중 여러명이 [[야쿠자]]가 되는 길을 택했고, 어머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본인 역시 야쿠자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야쿠자가 되었다면 젊었을 때 이미 생을 마쳤을 것 같다고.[[https://www.youtube.com/watch?v=Qt35YRb0fWU&feature=youtu.be&t=22s|#]]] 더욱이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복싱]]까지 배우기 시작해서 싸우는 실력이 날마다 일취월장했다고 한다.[* 실제로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 비트 다케시는 일본 연예계에서 한 주먹 하던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런 다케시를 보다 못한 어머니의 설득과 격려로 다케시는 마음을 다잡고 수험 공부에 매진하여 [[1966년]] [[메이지대학]][*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학이다. 한국의 [[SKY(대학교)|SKY]]와 유사한 신조어인 [[MARCH]]에 속하는 대학교이다.]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졸업이수학점인 140학점 중 106학점까지 수료한 상태에서 '''[[전학공투회의|전공투]]'''[* 60년대 일본 학생 운동의 대명사. 당시 전공투는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반정부 학생운동집단의 집결체로 알려져 인기가 좋았다.]에 연루되어 대학에서 제적당하게 된다.[* 2004년 메이지대학 측에서 특별졸업을 인정하였다.] 사실 다케시는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머니의 권유로 대학에 진학한 것이었기에 딱히 학업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신입생때는 낮선 환경에 적응이 안되어 수업을 째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당시 유행하던 [[재즈]]를 감상하곤 했다고. 카페 주인의 눈에 띄어서 [[웨이터]]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학생운동에 처음 가담한 계기도 같이 대학을 다니는 동창들이 너나할것 없이 다 전공투에 빠지는 것을 보고 '전공투에 적을 두면 대학 문화에 조금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였으며 학생운동에 열정적으로 몰두한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공투 출신 치고는 좌익 사상에 그다지 관심없는 면을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